660년 당과 신라 연합군은 수륙양면군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지만 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남부에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국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 간 공방전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계속됐다. 663년 8월 나당 연합군과 백·왜 동맹군 사이에서 백강해전이 벌어졌다. 탐라의 수군도 참가한 치열한 전투였지만, 백·왜 동맹군은 참패를 당했다.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왜국은 나당 수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664년 해안가의 임시정청을 20여㎞ 내륙인 다자이후(太宰府)로 옮겼다. 이어 가네다성, 오노성, 기이성을 필두로 대마도, 규슈, 세토 내해를 거쳐 나라 지역까지 전략적 요충지마다 해양방어체제를 갖췄다. 모두 도호슌쇼(答春初) 등 망명한 백제 달솔(백제의 16관등 중 제2위 품관)들이 주도한 백제식 산성이다. 그리고 당과 화친 교섭을 시도했다.
당나라는 667년 9월부터 고립무원인 고구려를 총력을 기울여 공격했다. 다음해인 668년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에 압록강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고, 9월 수륙양면작전과 남북 협공을 받던 평양성은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함락당했다. 그러나 압록강 이북의 40여 성은 계속 저항했으며, 안시성은 671년 7월에야 항복했다. 고구려는 700년의 역사와 자유의지를 유산으로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70년간 벌어진 대전쟁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제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나라는 이용 가치가 떨어진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복속할 것을 압박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고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손잡고 육지와 해양에서 10년 가까이 ‘나당전쟁’을 벌였다.
결국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은 서로 단결해 당나라군과 전쟁을 벌여 이민족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동쪽 유라시아 세계에서 일어난 또 다른 질서의 재편이라는 유리한 환경도 작용했지만,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복수심에 불타 당나라 편에서 신라를 공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민족의 역사는 가정하기조차 싫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 있다. 고구려와 수·당 간에 벌어진 70년 전쟁은 동아시아 종주권을 둘러싼 종족 간의 대결, 문명의 대결이었으며, 무역권 쟁탈전의 완결판이었다(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어쨌든 고구려의 멸망으로 우리 민족은 대륙을 상실하고 해양 주도권을 일부 빼앗기면서 동아지중해의 중핵 조정 역할이 약해졌다.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 종족들은 훗날 우리를 압박한 강대국으로 변신했다. 한편 일본열도에는 탈출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일본국이 탄생(670년)했으며, 이들은 신라는 물론 한민족과 영원한 적대적 관계를 고수하게 된다. 지금 세계질서가 재편되고 중국 중심의 질서가 강요되는 현실 속에서 남북한의 적대감은 더욱 높아간다. 거기에 남남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몫이며, 사건의 축적이 아니라 의미의 재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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